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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박송죽
Subject   인생에 있어서 문학이란 무엇이며 그 문학 속에 시의 형태는 어떠한가?

인생에 있어서 문학이란 무엇이며 그 문학 속에 시의 형태는 어떠한가?

사실 인생 그 자체를 꼬집어 무엇이라고 정의하기가 어려운 것처럼 인생에 있어서 문학이 어떤 역할을 하는가에 대하여는 더더욱 애매모호 하여 정의를 내리기에는 정말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산다는 그 자체가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인생을 참되고 진실하게 살아가면서  삶의 진지한 답을 구하고자 노력한다면 인생에 있어서 문학이란 인간의 구원의지를 부각시켜주는 구심점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육체를 위한 영양소가 우리가 먹는 음식이라면 정신적인 영양공급을 위한 것이 문학이 아닌 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가 우리 인간 모두에게 구원이 되듯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정신적인 구원을 위한 것이 문학이라면 그 문학의 길을 가기 위한 삶은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하겠는가 의문이 따름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종교가 궁극적으로 선과 악을 구분하여 형이상학적인 개념으로 인간구원 된 삶을 (영성) 위하여 존재한다면 문학 역시 미래지향적인 위치에 서서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존재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명제 아래 자기가 설정하는 가치판단에 따라서 자기 삶의 방향이 설정되는 것과 같이 문학의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은 더더욱 진지하게 삶을 받아드리고 또 남의 아픔도 내 아픔으로 받아드리면서 마치 순교자적인 입장에 서서 자기 정립을 하면서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띠누스는 성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 당신이 빵을 사고 싶을 때 동전을 지불한다,
가구를 사고 싶을 때 은전을 지불한다.
그리고 토지를 사고 싶을 때 금전을 지불한다.
그러나 사랑을 사고 싶을 때는 /당신은  당신 자신을 지불해야 한다. //오직 사랑의 값은 당신 자신이다.“ 라고 갈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아픈 영혼에게는 위로가 되고 상처 난 영혼에게는 치유시킬 수 있는  능력과 힘이 우리 안에 내재되어 그 힘이 발휘 할 수 있을 때 어쩌면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의 어둠을 가시게 하는 산소호흡기와도 같은 문학인으로서의 사명감이 뒤따라야 하지 않겠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미국으로 망명한 소련작가 솔체니친은 이렇게말했습니다. <문학은 가장 진실한 삶의 추구요, 표현이요, 실천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본질을 안고 있는 문학의 형태는 어떠해야 하는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학은 여러분도 아시다 십이 언어의 예술입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것처럼 하느님의 속성을 지닌 언어로서 창작활동을 하는 우리 문학인들은 그 어떤 분야에서 종사하는 사람들 보다 자긍심을 가지고 “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가톨릭문인으로서의 사명감을 다 해야 할 것입니다.
문학의 여러 장르를 구분하면 시, 시조, 소설, 아동문학, 수필, 희곡 등 등 여러 장르가 있습니다만 제가 문학의 여러 장르 중에 시로서 1958년에 <보라 빛 의상>이라는 처녀시집을 상재한 후 지금은 돌아가신 김춘수 선생님께서 <현대시학>에 추천하여 현재에 이르도록 시 작업에 임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여러분에게 제가 시에 초점을 맞추어 말씀 드리겠습니다만 그 이전에 소설과 수필에 대하여서만 간략하게  말씀 드린다면
소설은 현실적인 삶의 현장에 초점을 맞추어 유추된 사건들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가공적인 인물이나 사건을 등장시켜 리얼하게 꾸며서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 소설의 특질이라면  
수필은 일정한 루울이 없이 인생의 체험이 바탕 되어진 많은 소재를 자유자재로 그야말로 구애 없이 관념적인 자기 노출에 앵글을 잡아  감정, 혹은 자기가 격은 체험 등을 소재로 하여 자유로운 수법으로 독자에게 전달하는 산문문학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자유자재로 표현하는 여러 장르 중애 특히나  詩는 가장 섬세한 언어로 조립된 영혼의 울음소리며 삶의 핵이라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詩는 극도로 압축시킨 언어로 초월적인 상상력을 총 동원시킨 영감으로 얻어지는 영혼의 울음소리며 言語로 그린 한 폭의 정갈한 수채화와도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詩 작업에 임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절제된 언어로 조립된 詩가 독자로 하여금 많은 상상력과 사상성을 요구하면서 공감대를 형성하여 준다고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톨스토이는 <詩는 인간의 혼속에서 타고 있는 불이라고 했습니다. 그 불은 타면서 열을 가해주고 또 빛을 발하여 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불은 자연적으로 발산하는 불이 아닐 것입니다.
그 불은 시인 자신의 뜨거운 가슴과 삶으로서 産苦의고통을 통하여 점화시켜 주는 불꽃일 것입니다.
마치 자기희생과 고통으로 빚어진 詩가 독자의 魂속에 들어가서 사랑의 체온으로 상대의 마음을 따뜻한 감흥으로 데워 주는 불씨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코일과 코일이 연결되어야져야 만이 전류가 흘러서 빛을 발할 수 있는 것 같은 이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과 독자는 서로가 서로의 뜨거운 마음과 영혼으로 밀착되어 스파이크 되는 사랑의 불이라고 생각합니다.
밀톤은 <웅대한 詩의 창작을 원한다면 그 생활이 웅대한 詩어야 한다.>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실천해야하는 우리 가톨릭문인들의 삶도 웅대하여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살아있는 붓끝을 다듬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이 어둡고 혼탁한 시대에 정의로운 붓끝으로
산소호흡기와 같은 역할을 담당해야 할 무거운 사명감이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詩를 형성하는 과정에 있어서 그 특질 속에는 운명적인 죽음의 빛깔까지도 수용하고 표출할 수 있는 시인 자신의 인생관이나 세계관이 사상성으로 부각되기도 하고 감정순화를 바탕 둔 정서적인 리듬이 하나의 음율로 음악성을 부여해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한편의 詩를 읽는 이로 하여금 음악적 리듬 감각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詩의 묘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또 詩人자신이 어떤 사물을 마음속에 비쳐지는 이메지인  영상성를 지니고 독자에게 또 다른 풍부한 형상으로 전리되어 존재성을 부여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詩의 특질 속에는 사상 정서 ,음율, 영상 압축성과 과도 같은 것이 복합적으로 포함되어 하나의 생명을 지닌 詩로 탄생된다고 정의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詩의 형태를 세분화한다면 정형시, 자유시, 산문시, 기행시로 대략 분류할 수 있는데, <정형시>는  형식, 내용, 성격상으로 일정한 음률에 맞추어 쓴 詩>라 하겠고, <자유시>는 어떤 형식에 구애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쓰여 지는 詩를 자유시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산문시>는 어떤 구애 나 형식 없이 쓰여 지는 시로 대략 구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용상으로 분류하면 개인의 주관적인 사사한 감정을 바탕으로 표현되어지는 서정시가 있고 국가와 역사적인 체험이나 영웅의 운명, 혹은 神의 이야기 등을 객관적으로 서술한 서사시가 있습니다.
그리고 극시가 있는데 그 극시는  詩의 의식을 지니고 희곡의 형태로 쓰여 진 詩를 극시라 합니다.
끝으로 성격상으로 분류한다면 목적의식이 없이 운율과 표현을 중요시한 <순수시>가 있고 개념위주이거나 목적의식으로 쓰여 지는 <경향시, >혹은 이메지와 지성과 지성을 강조하는 <주지시>가 있습니다.
그리고 민족정서의 계승으로 민요조로 표현되어 쓰여 지는 <전통시>와 현실 참여의식으로 쓰여 진 <참여시> 등으로 대략 구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각형태가 다르게 쓰여 지는 여러 가지 詩들이 형성 과정이나 그 성질을 설명하기에는 한정된 시간 안에 다 말씀드릴 수 없고 다만 독자가 詩를 감상할 때 혹은 詩人이 시를 쓸 때 사물을 바라보는 마음의 눈에 대하여 잠깐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마음 안에서 나오고 마음의 표현은 행동으로 옮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물을 단순한 사물로서 받아드릴 때 산은 산으로 혹은 바다는 바다로서 늘 우리가 지켜보는 풍경으로서 이메지화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에 눈은 평범한 강이나 바다이지만 인식하고 수용하는 능력에 따라서 보고 느끼는 점이 각각 다르다고 봅니다.
프랑스의 시인 <필리프 사보네>는 <눈을 뜨면 나에게 풍경이 보인다. 눈을 감으면 나에게 당신의 얼굴이 보인다.> 라고  읊었습니다.
어쩌면 이 시인의 눈에 비치는 풍경은 풍경만이 아니고 그리운 사람의 아름다운 얼굴의 하나일 수일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감정을 지닌 사람에게는 모든 사물이 사랑자체로 부각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단순한 풍경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나 자연을 바라본다 하드라도 마음이 어지러운 사람에게는 그저 담담하게 스치는 꽃이거나 자연일 것입니다.
그러나 무관심 속에 버려둔 돌 하나에도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면 그것은 단순한 돌이 아니라 신비스럽거나 어쩌면 돌처럼 인내하며 거듭 죽어 다시 태어나는 삶의 자세를 배워야할 교훈으로도 받아드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매순간 순간 죽어주는 행위로 매 시간마다 살아나는 거룩한 부활을 체험해야 하는 삶의 연속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우리들의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무엇 보다 부활을 체험하기 위하여서는 깨끗하고 정결한 영혼과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하느님의 계명의 표지판이나 다름없는 양심이 시키는 되로 믿음과 순종과 사랑의 실천 행위로 현실을 살아가야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아드리고 느끼는 사람의 감정의 차이에 따라 앉아 있어도 천리라도 갔다 올 수 있는 것 과 같이  독자 역시 한 편의 詩속에서 독자만이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상상력의 세계가 있을 것입니다.
한 편의 시 속에서 그리운 사람을 마음속으로 만날 수 있고 어린 날의 추억 속에 칡넝쿨 우거진 고향도 단숨에 다름 질 처 갔다 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속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눈은 초월적이기도 합니다.

마치 의사가 현미경으로 미세한 세균을 발견하려는 노력처럼 마음의 렌즈로 투시되어오는 모든 사물과 삶의 그 자체를 진하게 체험하고 아픔으로 靈歌를 불러야할 사명감이 詩人에게 있다면  독자 역시 그 시의 세계에서 시인 못지 않는 상상력과 이해력으로 융화되고 동화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윤동주 시인은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한 것처럼 고통과 시련이 삶의 거름이 된다면 그 고통에 도전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의 작품을 잉태하는 과정에 있어서 언어가 그 작품의 재료가 된다면 마음의 눈이란 그 작품의 구성체를 만들어주는 태반의 역할을 하며 또 독자의 상상력의 세계에서 활력소 역할까지 담당하게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과 독자는 누구에게도 구애받지 않는 상상력과 자유를 누리게 되는 권리를 스스로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고통의 산고를 치루면서 쓰지 않고는 못 견디는 詩人의 값비싼 자유가  詩를 쓰는 창작행위로 전개된다면 독자 역시 한 편의 詩를 감상할 때 자기 권리는 어쩌면 누구에게도 침해 받을 수 없는 자기만의 특권 행위 일 것입니다.
<발레리느>는 한 편의 詩는 知性의 축제라고 말했고// 프랑스 시인<이브본노와>는 詩는 인간의 언어가 그 근원적인 리듬으로 환원됨으로서 이루어지는 상과 실존의 비결스러운 의미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詩는 틀림없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여 주며 우리의 유일한 본질적인 사명을 이루어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의미를 두고 가령 <박목월>선생님의 <나그네> 같은 詩는 절로 맴돌아 나오는 애송시의 하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강나루/ 밀 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 /가는 나그네=
이 詩는 별로 깊은 뜻을 지닌 것 같지 않지만 한 폭의 정한 수채화를 보는 느낌이드는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단순한 상황이지만 우리의 생활 감정과 애환을 잘 묘사한 작품으로 소박한 정감을 주고 친근감까지 줄 수 있는 서정주 선생님의 <무등을 보며>라는 작품을 읽어보면 절로 가슴이 찌잉하게 저미는 뜨거움을 맛보게 됩니다.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아이들을 기를 수밖엔 없다.

목숨이 가다가다 농울 쳐 휘어드는 /오후의 때가 오거든
내외(內外)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누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 태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이처럼 때 묻지 않고 고결하고 순결성을 지닌 작품은 가난이 오히려 고맙게까지 느껴지는 詩이기도 합니다.
한 밤을 꼬박 울어 샌 사람이 아니면 인생을 논할 수 없다는 말이 있듯이 굶어 보지  못했고 가난을 모르고 자기 욕구 충족에만 혈안이 되어 사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넌센스 같은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인의 눈에 비취는 가난은 가난이 아니라 오히려 청빈함을 자랑할 수 있는 마음의 부로서 감사하며 삶을 더욱 진하게  보람 있게 또한 진실 되게 살아가려는 자기노력의 자세가 심성의 밑바닥에서 우러나오는 아름다움으로서 승화되고 있습니다.
마치 이 詩는 고갈되어가는 우리 영혼을 마르지 않는 샘물로 이끌어 가는듯한 시원하고 청순한 맛을 느끼게 해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詩를 읽는 묘미와 참 맛은 아주 농축시킨 탕재을 먹고 아픈 영혼이 치유되는 것과 같은 인간 본질 안에서 우러나오는 진실 그대로의 때 묻지 않고 순수한 영혼의 울음소리이기도 합니다.

영혼이 맑아야 육신도 건강할 수 있다면 우리는 영혼을 맑게 간직하기 위하여서도 詩를 많이 감상하고 詩를 쓰는 시의 저변확대가 더더욱 요구되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사실 현실은 모든 문명이 다원화 되어 복잡해진 메카니즘 시대에 있어서 구원의식으로 詩를 대하여야 할 것입니다.
<아놀드 토인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문명이나 사회의 몰락은 외적인 친입이나 화제에 의한 것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정신분열과 사회의 부조리에 의한 자기 결정능력의 상실이다>라고 슬픈 현실을 개탄 했습니다.
사실 정신의 빈곤을 초래하는 현대문명은 흡혈귀처럼 우리의 생활 속 깊이 침투하여 무서운 병 보다 더 무서운 인간성의 상실이라는 질병을 안겨다 주는 이런 현실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럴 때 일수록 우리 신자에게는 현실이 대속의 십자가가 되어 우리가 먼저 참수해야 한다는 삶의 자세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생활이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를 닮는 생활인가 생각하여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톨릭은 체험의 종교이며 몸소 체험한 그리스도의 뜨거운 사랑을 실천하는 종교라고 봅니다.
나의 기준이 아닌 하느님의 기준으로//이용대상이 아닌 사랑의 대상으로 강요가 아닌 자발적인 순종으로 //온전한 삶과 온전한 믿음으로 봉헌되는 우리들의 삶의 우선순위가 되어 언제나 어디서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우리의 일상 속에 =우리 자신이 성전이 되고, 움직이는 복음서가 되어= 그리스도의 빛을 발산할 수 있을 때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 하듯이 문학 역시 인간 구원 의지를 부각시켜주는 역할을 담당 할 수 있으리라고 감히 부족한 자신으로서 그렇게 생각하면서 저의 졸시 몇 편을 낭송하고 두서없는 내용으로 마치겠습니다.
    2011 년 가톨릭 문학강좌에 강연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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