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송죽 시인 홈페이지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Total 126articles,
 Now page is 1 / 7pages
View Article     
Name   박송죽
Subject   사랑으로 문학의 길로 이끌어 주신 선생님들을 생각하면서

사랑으로 문학의 길로 이끌어 주신 선생님들을 생각하면서
    - 돌아가신 유치환, 김춘수, 이영도 선생님-

              

고통과 그리움으로 출발한 나의 문학의 길을 인도하신 분은 돌아가신 김춘수선생님과 유치환 선생님과 이영도 선생님이시다.
  때로는 절망하고 회의를 느끼며  절필하고 싶을 때마다 큰 버팀이 되어 채찍과 격려가 되어 오늘까지 문학이 내 삶의 전부라고 생각하며 숙명처럼 60년 가까이 절필하지 않고 문학의 길을 가고 있다.
  사실 나는 문학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고등학교에 다닐 때 학교 측의 권유로 <백일장>에 나가 <오직 부르고 싶은 이름이기에>란 시로서 장원을 하고 그 이후에 백일장마다 여러 가지 상을 타면서 <일출봉에 해 뜨거던 가곡 작사> 했던 김민부와 박태문, 장승재. 강상구,..등<<난>>이란 동인으로 활동할 때 김춘수 선생님께서 마산 중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면서 한 달에 한 번씩 부산까지 오시여 문학 지도를 해 주셨다.
<일출봉에 해 뜨거던>  이란 가곡 작사로 널리 알려진 천재시인 고 김민부 시인이 <항아리 시집> 을 출간 하였을 때  모교에서 <보라 빛 의상>이란 내 처녀시집을 출간하여 준 것이 화제가 되어 민주신문을 비롯하여 여러 신문사에서 화제꺼리로 기사화 해 주기도 했다.
그 당시엔 추천제로 문단에 데뷔하기도 하였지만  처녀시집 출간한 것으로도 문인으로 인정되던 시절 이였기 때문에< 유치환, 홍두표, 조향. 김일구. 김태홍. 손동인 조유로...,시인>등  아무튼 지금은 다 기억 할 수는 없지만 선배 문인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으며 문단의 말석 자리에서 활동했다.
지금 조선호텔 맞은 편 <백산 문학관> 그 위치에 폐간 된 민주신문사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민주신문 문화면에 내 시를 자주 게재하여 준 시중에 <여울>이란 시가 작곡되기도 했다.
  그리고 또 고 진병덕 화백과 함께 <사제시화전>을 지금 용두산 공원에 올라가는 그 당시에 유일한 문화 공간 이였던 <칸타비례>에서 전시 할 수 있게 해 주었고 전교생들이 줄을 서서 관람하게 하기도 하였다.
시화전을 마치던 날 여러 문인과 선생님을 모신 자리에서 김춘수 선생님께서<박송죽의 문학세계>에 대하여 격려의 말씀을 해 주셨고 그 이후 선생님의 추천으로 <현대시학>을 통하여 문단에 데뷔 하였다  
김춘수 선생님은 너무 엄격하시여 선생님이 문단에 추천한 사람은 단 세 사람밖에 없을 만큼 가까이 가기에는 너무도 조심스러웠던 선생님이셨다.
그러나 오히려 박 군! 박 군이란 호칭으로 격이 없이 대하여주시던 유치환 선생님을 허물없이 대할 수 있어 좋았고 그 당시엔 유치환 선생님이 경남여고 교장으로 재직하고 계실 때 퇴근 후 진병덕 화백 ,조순 선생님과 함께 학교 정문 앞 문방구에 가서 담소를 나누는데 겁도 없이 함께 적 쇠 위에 조개구이로 막걸리 한 사발씩 얻어 마시기도 했다.
김지향 시인이 울산에 얼마간 머무르고 있을 때 <울산 지부와 라이온즈클럽, 노타리 클럽>  초청으로 고 진병덕 화백님의 그림으로 시화전을 열게 되었고 그 때< 초청장의 발문>을 유치환 선생님이 써 주셨다.
그 이후 공직생활을 하다 결혼하게 되어 교장실을 방문하여 결혼하게 되었다고 말씀드렸더니 한참을 아무 말도 하시지 않고 침묵하고 계시다가  축하의 말 보다 “박 군! 아깝다”라는 말로 일축하시기에 그 당시에는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였지만 그러나 세월이 많이 지나고 절필 상태로 고된 시집살이를 하면서 선생님의 그 말씀이 이해가 되었다.
이처럼 유치한 선생님은 오리려 추천하여 주신 김춘수 선생님 보다는 더 마음속에 아직도  뜨거움으로 남는 것은 청마 선생님이시다.
통영시청에서 유치환 선생님이 돌아가신 1주기 추모 행사에  <푸른 생명의 깃발로 흔들리는>이란 추모시를 시청강당에서 낭송했고 고동주시장께서 낭송했던 시를 문학관에 두겠다고 달라하여 드렸으나 소장되어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이 영도 선생님은 금정산 <애일당>에 계시다 장전동으로 아담한 집을 사서 거처를 옮긴 이후에도 자주 방문하여 때로는 자고 오기도 했다
  선생님께서는 친정 부모 형제 다 돌아가시고 홀로 층층시야에 엄함 시집살이를 하는 내 처지를 안타까워하시면서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비는데..!?”하고 시누이 여섯 명의 등살에 신경성으로 위벽이 헐어 구명이 날 정도로 위험하다는 진단소견을 말씀 드렸더니 친정 부모처럼 안타깝게 생각하시면서 자주 전화를 주셨다.
아마도 마지막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전화가 와서 수필집 출간을 위하여 출판사에 간다 하시면서 “ 닭똥집 말린 것과 건삼을 갈아서 꿀에 재어 두었다 먹어라” 고 당부 하시고 며칠 이후에 신문으로 선생님이 돌아가신 비보를 접하시면서 정말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은 슬픔은 아직도 잔잔한 여울로 남다.  선생님은 언제나 한복으로 아름답고 청초한 모습을 보여주시던 선생님께서 수필 교정보려 가시기 위하여  보선을 신으시다가  지병인 고혈압의 압력에 의해서 운명하셨다는 기사를 보았다.
  너무도 뜻밖에 비보을 접하면서 멍 치 끝이 아리고 슬픔을 참을 수 없었다.  정말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세분 선생님들은 내 문학의 길에 큰 버팀목이 되어 주셨고 이제 나도 이 지상을 떠날 날이 가까워 오니 더더욱 지난날이 뜨거운 마음으로 생각하게 한다.
2019   =길=

 Prev     사랑의 편지
박송죽
  2019/11/25 
 Next     다시 도지는 분노의 여진
박송죽
  2019/06/11 



Copyright 1999-2021 Zeroboard / skin by lifesay
Copyright all right reserved psjpoem.pe.kr. Designed by San1000.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