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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박송죽
Subject   생명의 신비를 노래하는 영혼의 목소리



생명의 신비를 노래하는 영혼의 목소리
시인 박송죽

대담/송명화
(국제PEN한국본부 부산지회 부회장)


   ‘대지(大地)의 눈물이 대지의 꽃을 피우듯 해수병처럼 앓으며 한(限)의 옹으로 허기지고 숨가쁜 한 생애의 매듭을 맺으며 이렇듯 민들레 홀씨처럼 언제고 후~울적 떠나야 할 낙엽이 지는 노을 속에서 막차를 기다린다.’
  선생님이 22번째 출간한 시집 <생명의 신비, 그 아린 눈부신 빛> 서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까닭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십자가를 세워 둔 삶의 현주소이기 때문이다

어제는 비록 죽음이었으나
오늘은 새 생명이고
어제는 어둠이었으나
오늘은 빛이기에
어제는 신음하는 눈물이었으나
오늘은 영원한 생명의 부활이기 때문이다.

진정, 진정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까닭은
생명의 본질
내 영혼과 삶이 춤추게 하는
당신과 내가 하나이기 때문이다

-시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까닭은」 전문 -


  박송죽 선생은 생명의 시인이며 영혼의 시인, 신앙의 시인이다. 온 천지에 믿음과 사랑으로 불지르며 자신의 삶과 존재 전부가 주님을 닮게 해달라고 간구하신다. 그는 시간의 현주소를 챙기며 삶의 광야에서 영혼 안에 피는 사랑 꽃을 찾는 사람, 이 어두운 혈거 시대에 눈물의 꽃으로 피는 시(詩)를 생명수로 마시며 소중한 매일을 선율 고운 협주곡으로 삶의 획을 긋는 사람이다.
  누군가 여자는 사랑의 꽃불을 지피는 여신이라고 했다. 여자의 사랑은 본능이다. 이 본능인 모성적인 사랑은 어쩌면 하느님께서 인간을 죽기까지 사랑하는 그 본능과 같은 절대적인 사랑일 것이다. 이 본능적인 모성 때문에 사경을 헤매던 자식을 살리고 운명을 달리한 한 여인의 슬픈 죽음을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지울 수 없는 안타까움으로 기억 속에서 떠올리게 됨은 웬일일까.
  병원도 없는 산간벽지나 다름없는 곳에 살던 그 여인은 어린 아들이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피를 많이 흘린 관계로 사경을 헤맬 때 너무도 급한 나머지 옛말에 죽어가는 사람에게 피를 먹이면 살 수 있다는 막연한 말만 믿고 여물을 베는 작두에다 자기 손을 잘라 죽어가는 아들에게 먹였다는 것이다. (하략)

- 수필 「우주의 무게를 지닌 어머니의 사랑」 일부 -

  선생은 이 글에서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사랑’에 무게를 실었지만 나는 그 어머니에게서 선생의 삶을 꿰뚫고 있는 정서를 느꼈다. 착실한 신앙인으로서의 삶, 자식에 대한 절절한 사랑, 식물인간과 다름없이 된 남편을 보살핀 8년간의 고뇌, 반세기가 넘도록 이어지는 문학과의 열애를 생각해볼 때 선생의 삶도 가히 우주의 무게를 지닌다고 보아도 되지 않을까 싶다. 그 열정을 선생의 시집 『수채화 속에 그림 한 폭』의 서문에서 읽을 수 있었다.

  “내게 있어 삶이란 문학이다. 고통과 인내로 친숙한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이 바탕이 되어 문학의 본질적인 창조의 의미 안에서 심연의 깊은 곳에서 순수하고 가장 정직한 영혼의 노래가 시의 정신으로 투영되어 우리들의 삶의 한가운데서 생명으로 용솟음치는 맥으로 박동하여 독자와 만남의 교감대를 형성하는 피돌림으로 뜨겁게 전리되어 수혈되어지는 사랑 그 자체로 산화되는 삶의 몸짓이고 싶다.”

  선생은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셨다. 1958년 시집 『보랏빛 의상』을 상재하셨고 한참 뒤 고 김춘수 선생님의 추천으로 [현대시학]에 천료하였다. 1991년 세계시인상을 수상하셨고, 그 뒤 부산문학상, 부산시인상, 부산여성문학상, 가톨릭문학상, 문학타임문학상, 문예시대 문학상, 부산펜문학상, 가톨릭문학 공로상을 차례로 수상하셨다. 문단활동으로는 세계시인협회, 국제펜클럽, 한국문인협회 회원이시며, 부산여류문인협회, 문학중심작가회, 부산시인협회, 가톨릭문인협회, 부산문인협회 부회장을 역임하셨다. 저서로는 시집 『내 영혼이 눈뜨는 새벽』 외 22권, 수필집 『운명의 올을 풀면서』,『사랑하므로 아름다워라』, 칼럼집 『생명의 원천, 그 절대적인 사랑』 이 있다. 가을빛이 좋아서 우리들의 대화도 마른 풀향처럼 자연스럽기를 기대하며 질문을 드렸다.

■ 세월이 강물이라면 이제는 천천히 흘렀으면 할 연륜을 쌓아오셨습니다. 선생님이 걸어오신 장구한 문학 인생에 대하여 소개해 주십시오.

  내 인생 여정에서 문학은 신앙과도 같았지요. 문학이 나를 되돌아볼 수 있는 성찰의 거울이 되어 준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문학은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사물과 상호 교통하면서 그들과 은밀하게 영적인 대화를 나눔은 물론, 더불어 고뇌하고 아파하며, 그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며, 뜨거운 심장에서 샘솟는 사랑으로 영혼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거운 흰 머리를 이고 이 지상의 여정을 마칠 때가 되어서야 과연 나는 나답게 혹은 문학인답게 성실하고 진실 되게 삶의 값을 치르고 살아왔나 생각해 봅니다. 그저 부끄럽고 후회뿐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장구한 세월 동안 한눈팔지 않고 문학만이 내 생의 전부라는 생각으로 살아왔습니다. 지금도 원고지 앞에 앉으면 초심 때의 가슴 설레게 하던 순수성만은 잃지 않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하며 스스로 고맙게 생각합니다.

■ 작가라면 누구나 나름의 문학관이 있지 않습니까? 시도 쓰고, 수필도 쓰시고 그림도 그리는 분이니까 문학에 대한 생각이 특별하시리라 봅니다. 선생님에게 문학이란 무엇인지요?

  내게 있어 시를 쓴다는 것은 새롭게 거듭 태어나고자 하는 열망으로 다져지는 소망이라 표현하고 싶습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끝없는 자기와의 싸움으로 얻어지는 자아실현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 시(詩)는 아픈 고통으로 밝히는 세상에 아름다운 빛이고 싶습니다. 마치 들꽃향기 가득하게 얼비치는 세상 아름다움 안에, 맑고 밝음으로 채워질 수 있는 참된 삶의 진리 안에 접목될 수 있는 열망으로 시, 혹은 수필이나 문학의 모든 장르에 임하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예술적인 창작은 생명의 신비이며 생명의 본질을 추구하는 원형적인 숭고한 아름다움을 바탕으로 하여야 하기 때문에 뜨거운 가슴으로 삶의 진실 그대로를 투영시킨 아픈 고뇌의 참회록과도 같은 영혼의 노래가 되어 독자와 하나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 선생님은 작가 활동을 하시면서 22권의 시집과 두 권의 수필집, 그리고 한 권의  칼럼집을 출간하셨습니다. 자신만의 특징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내 생의 태반이 되어온 시나 수필에 대한 향수는 언제나 연민의 정을 떨쳐버릴 수 없는 내 생의 현주소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문학은 마치 광부가 금을 캐기 위하여 혼신의 노력으로 금맥을 찾아 헤매는 것과도 같이 나 또한 작품을 구성하는 언어를 찾기 위하여 지금까지 방황의 길을 멈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방황은 무력한 내 필력으로는 시나 수필을 구성할 수 있는 소재나 언어를 찾으면 찾을수록, 쓰면 쓸수록 내 영혼의 기갈은 충족되지 못하는 갈증으로 더욱더 심화되고 맙니다.
  남편을 땅에 묻고 유품을 정리하다 라면 박스에 담긴 엉터리 그림 뭉치를 발견하였습니다. 하버드대학 교수로 재직하던 큰아들과 사제의 길을 떠난 둘째 아들은 별 보고 아침에 학교 갔다 별보고 돌아오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 아이들을 기다리며 시작했던 작업이었지요. 홍보국에 계시는 L신부님의 권유로 용기를 내어 <시와 그림과 사진으로 엮은 시의 향연> 이란 타이틀로 2016년 3월4일에 <가톨릭센터 마음 밭 갤러리>에서 2주간 전시하였습니다.

■ 한동안 수필가로도 활발하게 활동을 하셨는데 요즘은 시 창작에 전력하시는 듯합니다. 수필을 쓰시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모든 문학의 장르 중에 가장 농축된 언어로 조립되고 모자이크 되어 독자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영혼의 노래인 시나, 진솔한 삶의 표현이 되는 수필이나 작품화하고 싶다는 열망은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공직 생활을 하던 남편이 과로로 인한 뇌출혈로 식물인간처럼 팔 년이란 긴 세월 동안 병석에 있었기 때문에 그이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하였습니다.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었지요. 그러나 남편이 돌아가시고 난 후부터는 오래 전부터 동인으로 활동하던 <수필 부산> 과 이해인 수녀님과 여러 문단 선배들로 구성된 <길> 동인으로 수필을 조금씩 쓰고 있으며 그 동안 지면에 발표한 작품들이 수필집 2권 정도 모였는데 이 지상을 떠나기 전에 책으로 묶어야 하겠다는 생각은 간절하나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 선생님의 많은 시들과 수필이 깊이 있는 명상의 기록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착실한 신앙생활의 영토에서 우러난 사색의 향기라 느껴지는데요. ‘그대’로 부르시는 그분께 한 가지만 질문할 수 있다면 어떤 것을 여쭙고 싶으신지요?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에 그 사랑을 답습하고 실천하며 살아가기를 소망하며 “당신의 길을 내게 가르치시어 그 진리 안에 걷게 하소서!!” 하는 말밖에 드릴 것이 없습니다. 너무도 부족한 자신이라…….

■ 나무가 스스로 그늘을 만들지 못하고, 별들이 혼자서 빛날 수 없듯이 우리 문인도 혼자서 그늘과 빛을 만들 수 없다고 봅니다. 문학적 스승으로 꼽을 만한 분이 계시는지요?

  무엇보다 문학의 길로 가게 문단에 데뷔시켜 주신 고 김춘수 선생님이십니다. 그리고 고 유치환 선생님과 이영도 선생님은 정말 사랑으로 문학의 길로 인도하여 주신 잊을 수 없는 선생님들이시지요. 고 김춘수 선생님께서는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蘭> 동인으로 시인 고 김민부, 박태문, 장승재, 지금은 일본에서 활동하는 소설가 강상구, 그리고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나 잘 기억나지 않는 여러분들과 활동하고 있을 때  마산서 일주일에 한 번씩 오셔서 문학 지도를 하여 주실 만큼 자상하게 문학의 길잡이 역할을 담당하여 주셨습니다.

■ 1990년에 발간된 창간호에 수록된 수필 「다시 갈 수 없는 두고 온 산하」에서 북한에 고향을 둔 선생님의 애끓는 아픔을 느꼈습니다. 고향에 대한 추억을 소개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내게 있어 고향이란 아련한 물안개 속에 수초 뿌리처럼 내려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분홍빛 향수이기도 하지만 생각의 밑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가장 강한 어두운 기억이기도 합니다. 철없던 어린 나이에 오빠의 등에 밧줄로 묶여 빗발치는 총성과 공포에 떨면서 사생결단 죽음을 각오하고 임진강의 격류 속을 뚫고 남하하였지요. 기회가 되면 연작시로 40여 편 넘게 평화통일 신문에 연재되었던 것들을 북한의 실상을 해설로 붙여 출판하려고 계획 중입니다.

‘국경 없는 하늘가/ 잡초 우거진 비무장지대에/ 산비둘기 훨훨/ 자유로이 날으건만/ 녹슨 철망 허리에 감고/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魔의 장막 속에/ 아버지 北에 묻고/ 어머니 南에 묻고/ 살 주린 바람 속에/ 땅 끝 적시는 이 비애의 눈물/ 우리는 왜 흘려야 하는가, 하는가/ (하략)
  
- 수필 「다시 갈 수 없는 두고 온 산하」속의 시 「흙으로 그린 3․8선」의 일부 -

****** 전후세대인 내가 선생의 심정을 다 헤아릴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 구절이 이처럼 가슴을 아리게 하는 것은 왜일까? 내가 금강산을 돌아보고 휴전선을 넘어 돌아올 때 느끼던 그 가슴 아림, 남북한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보며 흘리던 눈물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의 통분 속에 선생은 판문점에서 북한 땅을 바라다보며 이 시를 쓰셨을 터이다. 절실한 체험에서 육화되어 나온 핏빛 절규이기에 나는 그의 시를 가슴으로 뜨겁게 만났지 싶다.

■ 등단하신 지 60년이 넘었습니다. 그 동안 글을 쓰시는 경향도 많이 바뀌었을 것 같습니다. 본인의 창작경향의 변천사에 대하여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문단 데뷔 이후에 초기 시세계는 주로 실험의식으로 출발된 난해한 시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형이상학적인 세계를 타계한 맑고 순수한 존재성에 대한 사랑으로 간결한 시적 구도로 독자와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하나로 결합되어지는 시를 쓰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 시집 『열쇠를 찾습니다』를 읽으면서 80년대 초반, 저의 대학생활이 떠올랐습니다. 울분과 허무 그리고 최루탄 냄새로 채워졌던 안타까운 시간이었지요. 선생님의 선 고운 분위기와는 다른 힘 있는 목소리 속에서 시인의 사명의식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명이란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나 인류에 대해 가지는 작가의 사명의식이란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네, 참으로 숨이 막히도록 암울한 시대였습니다. 그 당시에 공직 생활을 할 때인데 5.16 혁명 이후 군이 모든 기관을 장악하여 <혁명공약>을 아침마다 선창하고 군대처럼 무조건 복종하며 죽어 살아야만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저는 사회과에서 부녀계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붙잡혀온 창녀들을 빨리 처리해 달라고 결재서류를 지사실에 올렸으나 이틀 동안이나 미해결되어 도지사 비서실의 (당시에 행정도 모르는 군인들이 총을 차고 비서실에 상주하고 있었음) 서류함을 엎어버릴 정도로 분노했고, 공직에 있으면서 데모 대열에 섰다가 다행히 공무원이라는 신분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지금 한일연구소 소장님이신 스승과 함께 하루 동안 구치소 신세를 졌었지요. 철창 없는 감옥이나 다름없었던 그 시절에 쓴 시들을 모아서 출간한 것이 『열쇠를 찾습니다』이지요.
이 시집이 <새계시인 협회의 앤솔로지에 화제가 되어 세계시인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한국 대표시인이신 고 조병화 선생님이 였는데 아마도 한국의 암울한 시대상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저의 시를 선정하였나 봅니다,
  그리고 시인이시며 평론가이신 황송문 교수께서 그 책의 서평에서 “박송죽 시인은 숨막혀했고 아파했으며 절규하면서 차라리 죽음이 완전한 자유라고까지 현실을 개탄하면서 진정한 삶의 열쇠를 찾아 나서겠다고 절규하며 호소하고 있다.” 라고 평하여 주시기도 했습니다만 우리가 숨 쉬고 사는 세상은 이기적인 욕망 때문에 고통의 신음소리를 내며 참 평화를 잃어가는 전쟁터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칼 보다 더 무서운 것이 펜 끝’이라는 문학정신과 사명의식으로 현실을 직시해야 할 것 같습니다.

■ ‘독자에게 읽히는 것이 좋은 작품’ 이라는 말도 하고 ‘문학성을 갖춘 작품’ 이라는 말도 듣습니다. 요즘 인기 있는 몇몇 시인들의 쉽게 쓴 듯한 이해하기 쉬운 시들을 폄하하는 분들도 있고 은유와 상징 등 문학이론에 충실한 시를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수님들도 봅니다. 선생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시론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꼭 그런 틀에 얽매인 난해함으로 인해 독자 없는 시인만이 공유하는 시가 아니라, 독자의 영혼에 위안과 기쁨이 되어 향기가 묻어나는 예술성을 바탕에 둔 시라면 더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  

■ 작가는 우리 언어의 파수꾼이라 불립니다. 컴퓨터나 휴대폰, 매스컴을 통해 우리말이 무차별적으로 훼손되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약어나 외국어와의 합성, 기호 글, 정상적이라 보기 힘든 조어에 따른 생경한 용어들이 난무하여 세대 간 이해를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어렵기만 한데요. 개인적으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오늘날 이렇게 하루가 다르게 시공을 초월하여 키보드 하나만 누르면 세계의 정보와 문화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편리와 혜택을 받고는 있지만 나이 탓인지 잘 적응이 되지 않고 오히려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진 물질문명과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대중적 쾌락주의가 판치는 이 시대에 세계의 어느 나라의 언어보다 우수한 우리나라의 언어가 오염되어 알아들을 수 없게 되어 간다는 것에 대하여 그저 할 말을 잊을 정도로 마음이 아플 뿐입니다.

■ 여성의 사회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미비한 점이 많다고 느끼는 것도 사실입니다. 사회 속에서 여성이 차별받지 않고 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사실 원만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려간다는 한 가지 일만도 힘에 겨운 일입니다. 여성의 권익과 저변 확대를 위하여 노력하면서 세상의 중심 안에 선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 어려운 일이나 과거와는 다르게 확실히 여성에 대한 인식 변화가 우리 사회에서도 상당히 진행된 것은 사실입니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한다.” 는 괴테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남성보다 무한한 잠재력을 소유한 여성 특유의 우수한 직관력과 섬세한 감수성으로 적극적으로 각 분야에서 활동한다면 지역이나 국가에서 바라는 유능한 인적 자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각 분야에 리더가 되기 위하여서는 자기 계발을 위한 피나는 노력을 해야겠지요.

■ 농부가 씨앗을 뿌리는 것은 수확을 기다리기 때문이고 우리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원하는 결과를 얻고 싶어서인 것처럼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리라 봅니다. 앞으로의 계획을 알고 싶습니다.

  특별한 기획보다는 건강이 허락하면 그동안 발표되었던 수필과 신앙 칼럼을 정리하여 출간하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태어날 때는 울고 태어났으나 이 지상의 여정을 떠날 때는 소중한 인연들에게 참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사랑한다는 말을 남기고 싶습니다. 웃으며 떠나는 뒷모습만은 아름답기를 염원하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 박송죽 선생은 체구는 작으나 뿜어나오는 에너지가 큰 분이었다. 잔잔한 호수 같기도 한, 파도 거센 푸른 바다 같기도 한, 우물 같이 깊은 정을 담고 있기도 한, 아이처럼 천진하기도 한 그런 분이셨다. 팔순을 훌쩍 넘긴 연세에도 문학 열정만큼은 젊은이 못지않은 그런 분이셨다. 평생을 이어 온 신앙생활이 하루하루를 기쁨으로 채울 수 있게 하는 자양분이 되고, 문학으로 이어진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신망 깊은 분이셨다.
  권대근 교수는 일찍이 선생의 수필을 평하면서 ‘순수 영혼을 좇아 끝없이 이어지는 작가의 자아 성찰이 구도자적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어떤 가식도 보이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다소 사변적이며 철학적이거나 추상적인 낱말을 즐겨 쓰시는 것은 오랜 종교생활의 영향이지 않을까. 문학이 선생에게 구원의 열쇠가 되었던 것이 틀림없다면 22권의 시집을 상재한 지금 선생은 그토록 희구하던 구원의 열쇠를 찾았을 터이다. 하기에 선생의 표정은 안온하였다. 후배들에게 “삶이란 이런 것이야, 아름다운 삶이란 이런 것이야. 시린 눈자위에서 눈물 한 방울 훔치게 만드는 그런 것이야.”라고 가르쳐주는 굵은 둥치를 가진 키 큰 겨울나무처럼 세월의 깊이를 안고 의연하게 삶을 내려다보는 선생의 그늘이 짙고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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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송죽
  2020/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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