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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박송죽
Subject   부산 예술가 열전

부산예슬가 열전·

  부산예술 편집장 박시형과 雲涯  박 송 죽의 대담

Q. 시인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 유년, 청소년, 대학시절

유복자로 태어난 나는 종종 내 또래의 아이들이 "아버지“라고 부르면 그 이름이 부르고 싶어 집에 들어가서는 이불을 덮어쓰고 울면서 아버지라는 이름을 혼자 수없이 불렀습니다. 그러다가 중학교 때 백일장에 나가 <오직 부르고 싶은 이름이기에>란 시제로 장원을 했던 것이 동기가 되어 백일장마다 나가서 상을 타니까 학교에 선생님마다 관심과 칭찬을 해주신 것이 동기가 되었고 고등학교 때는 학교 측에서 <보라 빛 의상>이라는 처녀시집을 상재 하여 주셨고 또 화가이신 고 진병덕 선생님께서 그림을 그려서 <사제 시화전>을  지금 용두산 공원에 올라가는 입구에 유일하게도 그 당시에 문화 공간 이였던 <칸타비례>에서 전시를 하게 되었습니다. 전교생이 단체로 관람하도록 학교 측에서 방침을 세웠기 때문에  전시장에 상주하도록 했지만 철없이 용두산 공원 비둘기 떼들에게 모이 주는 재미로 자리를 자주 비웠기 때문에 단임 선생님께 야단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2주일간 전시를 하고 마지막 날 <여러 문단의 선배님들과 언론인> 등을 초청하여 <박송죽의 문학의 세계>라는 주제로 고 김춘수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셨고 고 홍 두표 선생님, 조순선생님께서 축하의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울산 문인 협회의 초청으로고 진 병덕 화백의 그림을 곁 드려 시화전을 열었습니다.  그 당시에 경남여고 교장으로 재직하고 계시던 고 청마 유치환 선생님께서 초청장의 발문을 써 주셨습니다.
그리고 부산호텔 맞은편에 지금은 폐간된 <민주신문사>가 있었는데 문화면에 자주 내 시를 게재하여 주었는데 그 중에 <불꽃>이란 시가 노래 곡이 달려 <시민회관>에서 작곡발표회가 있었는데 부모처럼 나를 아껴주시던 언니가 위암으로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받고  참석도 못했습니다.
대학은 어머님과 가족들의 뜻을 거슬러 문과를 택하여 지금까지 문단생활 65년 가까이 한 우물만 파면서 돈도 명예도 되지 않는 파지<破紙>을 버리며 지금은 모든 육체적인 기능이 상실된 팔십 다섯 고개를 가쁜 숨 몰아쉬면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고 있습니다.

  
Q. 작품의 영감은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 시의 이미지로  떠올리는 시적 내향성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요>>

내가 시를 쓴다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나 자신의 확인이며 내게 있어 신앙처럼 소중하다고 생각 합니다.
그런 의미를 두고 생각한다면 사람마다 각자 저마다의 삶 안에서 자기만이 추구하는 생의 길이 있고 그 길에서 자기만이 성취해야하는 목표가 있다고 생각 합니다.
이와 같이 내 생명을 유지하고 형성하는 나의 시의 핏줄, 나의 시의 넋이 이질적으로 잘 타협되지 않고 적응되지 않는 세상 속에서 중병을 앓으면서도 또한 나를 형성하며 지탱케 하는 힘이 됩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한 줄의 시에 한 밤을 목마른 갈증으로 밤을 지새워야 하는 내게 있어 시는 결박이 되고 구속이 되나 어쩌다 이메지 화 된  한 줄의 시가 마음에 들면 이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기쁨으로 날개를 달게 할 때도 있습니다.
이렇듯 산고의 아픔을 겪으며 피 말리는 작업을 수십 년을 되풀이하여 길들어온 나의 시, 나의 문학관은 삶과 문학을 따로 구분할 수 없는 나의 삶의 전부인 그 자체이라고 생각 합니다.
지금와서생각하면 1958년에 고 김춘수 선생님께 추천 받아 문단 생활 한지도 65년 가까이 긴 세월을 전전긍긍하며 파지(破紙)도 많이 버렸지만  원고지 앞에서 그렇게 막막한 어둠으로 내가 왜 이렇게 바보짓을 하고 있는지 후해를 거듭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학은 삶의 근원적인 신앙처럼 나를 다스리고 있는  삶의 현주소이며 양심성찰의 거울이기 때문에 이 거울로 결점이 많은 나 자신의 과오를 투시하게 하고 또 나답게 되기 위한 노력과 거짓 없는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하는 출발점이 되어 모름지기 내 살아온 삶의 여정에 있어 가난 속에서 참된 행복을 배웠고, 절망과 좌절 속에서 인내와 신념을 배웠고, 또한  양심이 상표가 되어야 한다는 정직한 눈물 속에서 시를 쓰려 애써 왔습니다.
그리고 소중한 독자와의 만남에서 그냥 읽혀지는 시가 아니라 가슴에서 용해되고 분해되어 새살로 차오르는 생명이 되어 서로의 아픈 마음 싸 메어 주고, 추운 마음을 따뜻하게 쓰다듬어 주는 손끝으로 쓰는 시가 아니라 뜨거운 가슴으로 쓰는 시가 되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그러나 내 삶이 여물지 못하였듯이 문학도 인생도 신앙도 내 세울 것 없이 부족함으로 부끄러움을 안고 살아가기도 하지만 오늘까지 채찍이 되고 격려가 되는 이 시 작업은 무거운 나이를 이고 사는 나에게 앞으로 얼마나 이 지상의 여정이 허락될지 몰라도 허락하는 날까지 숙명처럼 함께 동반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솔체니친은 “ 문학은 가장 진실한 삶의 추구이요, 실천이다”라고 했고그리고 나의 스승이며 문단 등단과 오늘까지 시의 길을 갈 수 있게 출가 시켜주신 분이 고 김춘수 선생님께서는 산문집에 “왜 나는 시인인가”라는 주제에서 “ 존재하는 것의 슬픔을 깊이 느끼고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나는 시인이다.” 라고  하셨고 또 “시인이란 절대 자유를 누리려고 하는 존재다. 그리고 그런 자유는 현실에 없다고 깨닫고 있으면서도 심리적인으로 추구 한다. 그런 상태를 깊이깊이 의식으로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나는 시인이다”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사실 그런 것 같습니다. 명예도 지위도 권력도 더더구나 경제적으로는 늘 허기를 면치 못하게 하는 가난 속에서 삶을 길 드려야 하는 구차한 문학의 길인데도 왜 절필하지 못하고 숙명처럼 끈질기게 고통을 지불하며 산고의 아픔을 겪으면서도 버리지 못할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만 어쩌면 숙명처럼 받아드리고 고통을 자처하는 이 시 작업에 종사 하고 있다는 것이 살아가는 내 삶의 의미를 부여하여 주는 현주소가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 시 뿐만 아니라 그림도 손수 그려 시화전까지 전시 하셨다던데? >>
  
  손수 그린 그림으로 스물한 번째 시집에 담긴 시와 그림으로  가톨릭센타 <마음 밭 겔러리>에서 전시 했습니다.
아마추어보다도 더 미숙한 형체와 색체로 표현할 수 없는 서툰 화필로나마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습니다.
하얀 백지의 화선지에 먹물 한 방울이 떨어져 번지면서 형상화 되어가는 신비에 매료되어 남의 흉내를 내는 정도의 그림 그리기를 좋아 했습니다
처음에 그림 그리게 된 동기는 잠을 쫓기 위하여서였습니다.
새벽에 별을 보고 집을 나서서 별을 보고 귀가 하던 큰 아들이 고등학교 3학년 때  <하바드 대학 교수> 와 <지금 수도사제>로 수도자의 길을 가는 둘째 아들이 고 2학년 때 기다리면서 묵화와 바가지 공예를 시작했습니다.
누구에게도 사수 받은 적도 없고 그저 잠을 쫓기 위하여 묵화도 그리고 잠이 와서 꾸벅 거리다가 바가지 공예를 한답시고 날카로운 조각도에 엄지손가락이 뼈까지 드러나는 상처를 입으면서도  무사히 귀가(歸家) 하기를 바라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림과 바가지 공예를 하면서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그린 그림이 라면 박스에 방치 되었다가 남편이 고인이 된 후 그 유품을 정리하다 까맣게 잊어진 그림 뭉치를 발견하였습니다.
공직에 재직하고 있던 남편이 과로로 쓸어져 팔년 동안 뇌경색으로 어린애가 된 그의 손과 발이 되어 힘겨웁게 살면서 22번째 <미루나무 숲 바람의 음계<音階>를 밟으며>란 출간한 시집을 신부께
드렸더니 보시고 가톨릭센타 <마음 밭 캘러리>에서 전시를 열어보라는 권유에 용기를 얻어 <시와 그림의 향연>이란  타이틀로 2주간 시화전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또 불의 예술인 도자기에 한동안 심취하여 초벌로 구워낸 도자기에 서툰 매화꽃 그림을 그려서 유액을 발라 구워낸 도자기가 균열로 형상화 되어 있는 것을 보고 너무도 기분이 나빠서 혼자 말로 “어쩌면 내 모습 같네! 하고 부수어 버려야겠다!.”하는 말을 들으시고 도봉 선생님께서 “그 도자기를 내가 사겠습니다.” 하시면서 이렇게 균열 진 도자기는 인위적으로는 만들 수 없고 불이 만들어낸 하나의 걸 작품이기 때문에 귀하게 여깁니다.“ 하는 것 이였습니다.
도봉선생님과의 인연은 <현대시학 월간지에 =균열진 자화상=이란 시가 발표 된 이후 이였습니다. 아마도 어느 문인이 도자기 하려 왔다가 모르고 두고 간 문예지에서 (기장 면 옹오리) 라는 주소로 시작된 내 시를 보고 <손수 정성을 모아 구워낸  자완과 차 셋트)을 선물로 보내 주셨고, 또 도봉선생님의 소개로 기능보유자이시며 (무형문화재 제18호인 고 천 재동 선생님을 그 곳에서 만나 서로의 자기 작품 세계를 심도 있게 나누기도 했던 기억이 새롭게 생생하게 떠오르기도 합니다.

<< 선생님의 시가 여러 편이 작곡 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작곡된 경위를?

시는 영혼의 울림이며 인간의 내면적인 진실성을 바탕 둔 새로운 세계의 아름다움으로 눈뜨게 하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시에 곡이 달린 노래는 시공을 초월한 무지개빛 황흘함으로 우리들에게 위안과 정서적인 기쁜 감흥을 주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장르를 포괄한 예술은 닫힌 세계에서 열린 세계를 갈구하며 어둠으로 탄식하며 절규하는 절망의 한가운데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뜨거운 가슴으로 가장 아름다운 영혼의 노래로 불리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 영혼의 노래는 자연과 사물과 인간에 대한 애정의 출발이 되어 서로가 서로의 공감대를 형성하여 투영된 정신적인 자유의 날개를 달게 하는 감동과 삶에 리듬이 되는 성스러운 환희의 기쁨으로 다가오는 삶의 활력소가 되는 위대성을 갖고 있다고 봅니다.
마치 양심이 실종되는 어두운 시대일수록 그 시대의 심장부에 펨프의 역할로 새로운 피를 수혈시켜주고 또 마중물이 되어 사회나 국가나 문화가 정화 되어 인류가 평화롭게 사람이 사람답게 잘 살 수 있는 세상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생명의 노래>가사를 쓰게 된 동기는 폭염이 내려 쪼이는 한 여름에 막 아스팔트 공사로 채 마르지도 않는 틈새에서 노란 웃음꽃을 피우고 있는 민들레꽃을 발견하고 마치 일본군에게 정신대로 끌려가 모진 고난을 당하신 우리 어머니들의 한의 모습 같아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그것은 마치 대지<大地>의 눈물이 대지의 꽃을 피우게 하듯이 끈질기고 아린 생명의 반추에 경이감을 느끼며 쓰게 된 연작시 중에  <생명의 노래1>가 작곡가 안일웅 교수님에 의하여 <세계적인 독일 다름스타트 음악제에 한국 사람으로서는 유일하게 1961년 윤이상 선생님께서 발표 하셨고 두 번째로 안일웅 교수께서 발표 하셨습니다. 그리고 전북대학음악예술대학 <이종록 교수께서<오직 사랑 때문에> 외 30편 가까이 작곡하셨고> < 부산대 박미혜 교수<부산의 노래>,<권오철 한국예술 시곡 연구회 감독 <부산찬가>. <박홍석 작곡가<산다는 것은>외 3편등이 노래 곡으로 불러지고 있습니다.

<<현제 어떤 작업을 하고 계시는지요? >>

그 동안 지면에 발표된 작품들을 <생명의 환희, 그 눈부신 빛>이라는
제목으로 22번째 시집을 출간 중입니다

<<최근의 하루 일과는 어떻게 보내시는지요?>>

인간스스로 자초한 재앙이나 다름없는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모든 일상이 정지된 철창 없는 감방에 갇혀 속수무책 무 증력 상태에서 고통과 한숨으로 나 자신을 사랑하듯이 자연과 사물을 사랑하며 한 몸 이루며 소중하게 여기면서 살아가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 번 더 해 봅니다.  



2022 1 월호 부산 예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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