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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박송죽
Subject    오순절 평화의 마을

   오순절 평화의 마을

                      
<오순절 평화의 마을>은 세상에서 버림받아 오갈 때 없는 병든 사람들이나 고아들이 모여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돌아가신 오 수영 하지노 신부님께서 창설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말 버림 받고 병든 사람들을 한 식구처럼 사랑으로 보호하며 그 많은 식구들을 위하여 헌신적인 희생으로 돌봐주시면서 부모의 역할을 하고 계셨다. 그렇게 사랑을 몸소 실천 하셨던 신부님께서 이미 죽음을 예감 하셨던지“ 사제의 길로 인도 한 김태광 아오스팅 신부에게 연락하여 안수 해 달라고 하셔서 아들신부가 가서 안수 해드린  3일 이후에 신부님의 생일 날 돌아가셨다.
큰 아들이 미국에 유학 가기 전에 영세 받고 가기를 원 하였기 때문에 둘째 아들과 딸도 그 곳에 거처하는 사람들과 함께 영세를 받았다.
영세 받기 위하여서는 6개월간 교리를 배워야 하지만 학교에 다니기 때문에 통신교리로 대치하고 둘째는 영세 받기를 거부 하였으나 형 때문에 덩달아 영세하고 주일 미사 드리려 가자하면 이 핑계 저 핑계 구실을 만들어 주일 미사도 제대로 드리지 않았다.
그런 둘째가 대학 3학년 여름 방학 때 성 바오로 수도회에서 남자 수사님들과 힘께  나환자촌에 봉사 가서 신비한 체험을 했다.   손과 발이 문드러진 그들을 위하여 난생 처음 장작도 패고 돼지우리도 치우다 돼지와 닭의 분비물을 치울 때마다 너무 역한냄새가 나서 구역질을 하다 다른 수사님들 보기가 민망하여 <빈자의 성모님>이 모셔져 있는 뒤뜰에 가서 “여기 까지 저를 오게 하신 것은 무엇인가 뜻이 있을 덴데  제발 저 역겨운 냄새만은 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간절히 기도를 하고 돌아와 그 일을 다시 하는데 냄새가 전연 나지 않아 한 달 가까이 기쁘게 봉사하다 집에 왔다.
온 몸에 장작과 꾸준 일을 하다 상처 입고 왔기에 <가정 의학  병원>을 경영하는 한 선생에게 전화하여 상처에 바를 연고라도 가르쳐 달라 하니 “나병은 전염병인데 왜 그런 곳에 보내었는가 하며 질책 하였다.
그 곳에 갔다 온 이후 아들은 “ 대학 졸업하고 돈 벌어 고생하는 어머니 호강 시켜준다더니..., 졸업장은 어머니가 나대신 받아 달라 “하고 집을 떠나  가톨릭대학 편입시험에 합격하여 신학을 다시 공부했다..
  그리고 또 가톨릭 대학을 졸업한다고 다 신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2년이라는 기간 동안 의무적으로 사회에 나가 새로운 세상적인 체험을 하여 과연 평생을 구도자의 길을 갈 수 있을까?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수련기간 이라 하면서 잠시 집에 와서 하루 밤 자고  또 훌쩍 떠났다.
수도원으로 가는 길은 벼랑 끝으로 가는 외길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세상적인 모든 것을 버리고 /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통을 자처하는 수도자의 길을 가는 사람은 생명의 본질인 인간 존재의 가장 고귀한 삶을 고통으로 지불하는 사람들이다.
끝없이 내어주는 삶./ 아낌없이 후해 없이 다 내어 주는 삶.
목숨까지도 다 바쳐 /우주공간 삼라만상을 품어 안은 사랑으로/ 청빈과 겸손과 순명으로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그리스도 화 되어/ 공은 얻음이요 얻음은 곧 비움이요/ 비움은 영원실존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생명 법칙을 깨달음이다> =<생명의 원천 그 절대적인 사랑>이란 내 졸서에 수록한 일부이다.-
  아들 신부는 <폴란드>가 본원인 수도회에 입회하여 외국 신부님들과 함께 생활하기 때문에 소식이 궁금하여 전화라도 하고 싶어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지금 까지 지친 줄 모르고 <미국 전역인 보스톤 뉴욕 . 유렵 가다다, 독일, 영국  등등에 두루 다니며  교포 신자들의 영적 성장을 위하여 세미나에 바쁘게 다니면서 강의하는 것을  매일 새벽마다 <유투브>을 통하여 그의 음성을 들으면서 위안을 가진다.
그렇게 바쁘게 살던 아들신부가 < 파티마 세계 사도직  한국본부> 에  피정 지도 차 온다는 소식을 듣고 하루 밤은 자고 가겠지 생각하고 새벽에 자갈치 시장에 가서 전복과 해산물을 사다 조리해 두고 교우의 차를 타고 강의하는 곳에 갔다.
참석자들이 너무 많아 아픈 몸으로 긴 시간 앉아 있을 수 없어 <유아 실>에서 들었다. 강의가 끝나고 오후에 파견 미사를 드리는 중에 <하 안토니오 묜시놀 신부님께서 수녀님이 이끄시는 휄체어을 타고 제대에 올라가 “아직도 김태광 신부 같은 휼륭한 신부가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과 성모님의 그 아픈 마음에 기쁨을 드린다! ”하시면서 휄체어에서 벌떡 일어나 두 팔을 뻔쩍 드려 올리시는 것이다.>
자금은 돌아가신 하 안토니오 묜시놀 신부님은 독일에서 독실한 신자의 외동아들로 태어나 신부로 서품 받고 한국으로 파견되시었다.
하 안토니오 신부님은 <파티마 세계한국 본부>로 전국에 지부을 결성하여 한평생을 한국을 위하여 헌신 봉사 하신 신부님이시다.
아들 신부는 미사 드린 후 바로 가야 되겠다는 것을 컴퓨터가 고장이 났으니 고쳐 달라고 하여 집에 왔다. 저녁부터 먹으면서 궁금한 근황을 물어 보려고 했더니 사순절이라 금식해야 된다면서 컴퓨터만 고쳐 주고 밤 12시가 지난 늦은 시간에  “우리 집에 가야 한다.” 하고 훌쩍 가버렸다.
한편으로는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이 고맙기도 하지만<우리 집>이란 단어가 왜 그렇게 가슴으로 타 내리는 뜨거움을 억제 할 수 없게 하였었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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